2020년 02월 07일 10:58에 저장된 글입니다.
월광이 쏟아지는 창가에 서서 도심을 내려다 보았다.
환한 불빛으로...
하늘이 일그러진다.
바람이 쓰라리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 그 찬바람이 숨통을 죄여온다.
수 놓인 서울, 중부지역에는 폭설이 내려졌다.
새하얗게 쏟아지는 함박눈에 반사된 도시의 밤이 서슬 퍼런 욕망으로 번뜩였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하늘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쏟아지는 눈송이가 서하의 길고 까만 속눈썹에 엉겨 붙었다.
부드러운 램스킨 코트로 몸을 꽁꽁 감쌌지만,
살을 에는 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질퍽하게 눈이 녹은 도로 위에 버스는 꼼짝없이 서 있었다.
초조하게 시간은 흘러만 갔다.
선물 받은 고가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흐르는 시간을 응시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7cm의 명품 스틸레토 힐은 보기에는 우아했으나 눈길을 걷기엔 최악의 신발이었다.
이젠 손 닿으면 깨질지도 모르는 소중한 도자기를 대하듯 나를 다루었다.
핏기없는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생기가 빠져버린 눈동자는 공호했다.
며칠 사이 부쩍 마른 신영의 입술은 보기 딱할 정도로 부르터 있었다.
잔뜩 주눅이 든 어깨와 톡 건드리기만 해도 왈칵 눈물을 쏟을 것처럼
슬픔에 찌든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다.
귀엽게 동그르르 말려 올라가는 듯한 신영의 웃음소리와는 달랐다.
탄산수처럼 청아하게, 때로는 활짝 핀 꽃봉오리처럼 사랑스럽게 퍼지는 웃음소리.
대학에 들어간 후 신영이 그녀를 자주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토요일이나 일ㅇ일 오후, 햇빛이 좋은 날엔 정원에서 울려 퍼지던 맑은 웃음소리들.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혹은 밀린 잠을 낮잠을 보충하다가 그 웃음소리에 이끌려
창문을 내다보면 어김없이 그곳에 있던 여자아이.
재욱의 외모는 재벌가 3세라기보다는 배우에 가까웠다.
1980cm나 되는 큰 키와 골격 때문인지 쟁ㄱ의 인사은 혼혈을 떠올리게 했다.
자태는 무용수처럼 세련되었으며 유럽인처럼 섬세하고 풍부한 표정이 매력적이었다.
저음의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는 사람을 단번에 압도했다.
외모로 보나 조건으로 보나 강재욱은겉보기에 완벽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외적인 조건만으로 성사될 수 없다.
지연은 그의 어두운 내면이 싫었다.
지연의 댇ㅂ을 기달던 재욱은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기 시작했다.
메말랐던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한 병에 최고가를 불사하는 로마네콩티 와인으로 입안을 정렬했다.
유혹적인 짙은 향기가 혀끝을 타고 뇌 신경을 자극했다.
건축사무소 SIN. 대표의 성이 신 씨여서가 아니라,
대궐 신宸자를 써서 건축사무소 신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대표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신 대표라면, 신 神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도 남았을 거라는
추측을 감히 했다.
뉴욕시 남부 카운티,
아침부터 뿌리던 눈발이 오후로 접어들며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곧 그칠 것이라는 예감과 달리 저녁이 되자 항공기 운항이 전면 취소 되고,
대중교통 단축과 운전 금지령까지 내렸다.
밤늦게 미국 기상청은 사흘간 미국 북동부 지역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폭설이 내릴 것이라며
<눈 폭풍 경보>를 발령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정에 이르러 결국 도로까지 폐쇄되고 긴급 상황 준비령까지 발동한 상태였다.
한국을 떠나면서도, 시카고에 도착해서도 내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불안한 기운이
겨우 머리카락 조금 잘라 나갔을뿐인데 안개가 갇히듯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니 신기할 정도였다.
................................
동그랑땡과 잡채를 한 번에 먹었더니 목이 막혔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냉장고 문을열었지만 마실 물도 없었다.
아줌마가 약상자에서 드링크 소화제를 꺼내 내게 주었다.
소화제를 물처럼 마셨더니 식도에 걸린 음식이 시원하게 내려갔다.
나는 더 이상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번에는 소변이 마려웠다.
터미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올걸... 후회를 하며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았다.
그리고는 늘 하던대로 물을 내렸다. 난감해졌다.
큰일을 보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변기에 하얀 거품이 생겼고 지린내까지 풍겼다.
밖에는 벌써 얻ㄱ어둑해졌고, 사방이 진한 청색빛이었다.
새해 첫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바람은 더 차가워져서 입을 뗄 때마다 입김이 피어올랐다.
저만치 아줌마가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에는 아줌마와 나, 두 사람의 발소리만 들렸다.
감나무에 앉았던 새들이 아이들의 함성에 놀라 후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우르는 들판을 지나갔다.
푸른 보리밭 윌 종달새가 ㅜ지저귀고 밭둑에는 노란 꽃단지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길을 가던 친구는 갈대 잎 하나를 꺾어 들었다.
<이렇게 한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접고, 끝 부분을 찢어서...>
친구가 만든 것은 풀피리다.
친구에게 풀피리 만드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시집 간 고모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