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칼레의 시민
1347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때이다.
10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에 저항하던 프랑스 북부지방 칼레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 상태에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칼레의 항복사절은 도시 전체가 불타고 시민이 도살되는 운명을
면하기 위해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했다.
영국왕은 "칼레 시민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 그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도시에서 명망이 높은 시민 대표 6명이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후 교수형을 바다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6명이 선뜻 나섰다. 모두 도시의 핵심 인물이며 부유한 귀족이었다.
일등 부자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했다.
그러자 시장이 나섰다. 상인이 나섰다. 그의 아들도 나섰다.
7명이 되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다.
제비를 뽑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생 피에르는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고 모두 동의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6명이 모였다.
그러나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모두 안 나와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들이 처형되려는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당시 임신 중)으로
6명 모두 살려주었다.
그로부터 550년 뒤 1895년 칼레 시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로뎅(Rodin, 1840-1917)에게 조각상을 의뢰했다.
1895년 6월 <칼레의 시민>이라는 기념상이 제막되었다.
이 조각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雨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