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높았던 아이
다음 이미지 발췌
몇 해 전 수도권 한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성장판이 고장 나 키가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장애등급 6급. 가을 운동회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아이이다.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스타트라인에 섰다.
누가 보아도 이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출발 신호와 함께 뛰기 시작한다.
뒤쫓아가는 아이가 안쓰러울 뿐이다.
친구들은 이미 저만큼 뛰어가고 있다.
바로 그때다.
결승점을 30∼40m쯤 남겨두고 달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그리고 꼴찌로 뛰고 있던 그 친구를 기다렸다.
다가온 친구 손을 붙잡고 함께 뛰기 시작했다.
골인 지점을 나란히 통과한 친구들이 소리쳤다.
“우리 모두가 일등이야.” 아이는 울고 말았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 이웃들을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는 일이다.
그의 고통이 내 아픔이 되고 그의 시련이 나의 눈물이 되는 일을 말한다.
무엇보다 믿는 가정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놓치지 말고 격려해주는 일이다.
그것이 영양제가 된다.
격려는 칭찬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 무엇이다.
칭찬이 성공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라면 격려는 오히려 실패했을 때 주어질 수 있다.
칭찬은 행위에, 격려는 행위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칭찬은 언제나 더욱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놓을 수 있지만
격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수용되었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자라게 한다.
칭찬은 상대적이지만 격려는 절대적이다.
칭찬이 일을 기준한다면 격려는 사람을 기준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칭찬에만 너무 길들여진 자녀들은
정서적 절름발이가 되기 쉽다.
하지만 격려는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자아 존중감을 건강하게 한다.
많은 가정의 역기능이나 아픔은 비교와 비난에서 온다.
작가 스프라울은 한 번의 비난은 아홉 번의 칭찬이 있어야
겨우 평상심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격려는 비난이 주는 아픔을 뛰어넘어 사람을 신나게 한다.
살맛 나게 해 준다.
사람에게 의욕을 심어준다.
삶에 신바람을 불어넣는다.
격려를 받고 자란 사람의 모습은 다른 사람과 확연히 차이 난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우뚝 일어설 줄 안다.
격려의 방법은 따뜻한 말을 통해 시작된다.
작은 기도가 격려가 된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온다.
내가 슬픔에 빠졌을 때 함께 울어줄 줄 아는 이들 말이다.
가정이 바로 그런 격려의 성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