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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초기, 태종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신문고라는 북을 설치했다.
그러나 억울하면 치라던 이 북은 백성들에겐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할 데가 없는 백성을 위해 신문고가
설치됐다는 소식에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신이 났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은 신문고를 치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한양으로 갔다.
그런데 힘겹게 한양 의금부에 다다라 북을 치려하자
의금부 관리는 절차에 따르라며 되려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신문고를 치기 위한 절차란 첫째 거주지 소재의 관찰사에
고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 사헌부에
다시 고발을 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치게 했으니
이런 절차를 제대로 밟을 줄 아는 백성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런데 절차를 무시하고 신문고를 칠 수 있을 때가 있다.
바로 역모 사실을 알릴 때였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던 태종은 그 무엇보다
역모를 두려워했고 이 때문에 역모는 항상 누구라도
알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태종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과 역모를 차단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정치적 효과를 노리고 신문고를 설치했던 거다.
억울하면 북을 울려라.
덕치의 상징으로 백성을 위한 배려로 알려진 신문고.
그러나 그 북소리는 백성보다 왕의 권위와
신성함을 드러내고 여론 수렴의 상징 물으로만
존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