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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

1with 2021. 5. 1. 01:00

 

 

 

 

 

오랜만에 참 좋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초반 영화의 배경이 된 1801년 신유박해를 둘러싼

정치적 배경과 종교적 담론,

안타까운 역사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 씨 삼 형제, 약전. 약종. 약용의 비극은

천주교가 아시아에 전교되던 시대,

유럽이 처한 상황(프랑스 대혁명 이후 급격한 

가톨릭 교회의 쇠퇴) 아래서 

신앙의 근본주의적 태도(조상 제사 금지)라는

교황청, 더 정확히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원칙론에 기인했다.

 

지금은 천주교 신자라도 제사를 지낸다.

 

신앙의 토착화 inculturation 흐름은 

이제 모든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며 전교하도록

권장하는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전이다.

그때는 <죽을죄>였지만 이제는 권장하는 일이 된 것이다.

 

제사 안 지낸다고 죽을 일은 아니었다.

또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주교가 조상 제사를 미신이며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자

열심한 조선의 신자들, 특히 초반에 천주교 서학,

외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던 사대부 지도자들이 조상의

신줏단지를 불사르는 일이 벌어지며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사회가 분노한다.

 

박해의 빌미를 준 것은 오히려 현실을 모르는 북경의

주교였고 당시의 교황청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으로 일어났지만 결국 성리학으로 망한 것이다.

얻어서 쓰되 집착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오래된 체제는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는 서학을 

사학으로 규정하고 정치적 기회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다.

잘난 약용이와 약전이를 권력이 가만 둘 수 없었다

뛰어나면 위험하다.

 

정조의 죽음 이후  개혁적 지식인들은 고립무원,

위태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결국 약종은 순교하고 약전과 약용은 강진으로

흑산으로 유배 길을 떠난다.

약전의 삶을 바라보며 흑산도의 범부로 늙어가는

그 모습에서 스콧 니어링,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떠오른다.

 

그들은 그럼에도 참 잘 살았다.

몸은 지치고 피곤했을지 몰라도 잘 살아갔다.

 

자산어보 그는 끝까지 조선의 부국을 꿈꾸며 백성들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고민을 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횡포와

구조적인 모순들을 돌이켜 볼 거시적 담론은 이끌어 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진일보한 것은 왕도 신하도, 양반도 상놈도 적자도 서얼도 없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려했던

그 꿈은 아직도 이루어 가는 싸워가는 세상의 일부이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모두에게 이 영화를 강추한다.

 

흑빛 영상의 미가 아름답다.

 

흑산도 바다와 언덕 위 초가집의 마당이

비추어질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