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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자

1with 2018. 1. 31. 02:33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다음 이미지 발췌



몇 해 전의 일이다. 늦은 퇴근으로 집에 들어서니 남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동안 바로 위 상사가 앞 뒤도 재지 않고 본인 기분에 업무를 보았는데,
사장님과의 충돌로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동안 우리 집의 기도 거리 중 가장 비중 있는 부분이었다.
조석으로 본인이 하달한 업무도 못마땅하다고 아랫사람을 질책하는 전형적인 권위적인 상사였다.
훈시 시간 직원들이 조금의 환호에도(거짓된 환호임을 다른 직원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상사는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교만의 선봉에 있었다.
 
교만은 남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태도다.
바울도 그리 얘기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사람은 본래 겸손하기 힘들다.
조금만 틈이 생겨도 자꾸만 높아지려고 한다.
공부를 조금만 잘하고, 돈이 조금만 많고, 얼굴이 조금만 잘 생겨도 금방 높아지려고 한다.

진정한 성인은 겸손하며 자신을 낮추며 살아간다.
먼저 자신을 죽일 때 문제 해결의 길이 활짝 열린다고 할까?
 
어떤 환자가 수술을 두고 마취를 했는데 잘 안되었다. 그때 의사는 말했다.
<아직 안 죽었네>그리고 죽을 때까지 더 기다리거나 죽이려고 마취제를 더 써서 기필코 죽인다.


수술 부위를 죽이지 않고 수술을 하면 더 끔찍한 고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잘 죽어야 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 원리를 알고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했다.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자랑을 참고 잠잠히 지내면 그것이 날마다 죽는 삶이고,

분노가 치밀지만 그 분노를 참으면 그것도 역시 날마다 죽는 삶이다.
가끔 편안한 삶에 대한 추구가 유혹한다.
그러나 육신의 편안은 영혼의 평안을 빼앗아감을 알고 편안을 멀리하고 헌신이나 봉사를 가까이하는 삶을 알아간다.
<감사합니다>라는 빛깔 있는 말을 많이 하면서, 입은 하나 이고 귀를 두 개 가진 뜻을 따라

말하기보다 두 배 이상 듣기를 힘쓰는 것도 날마다 죽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