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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종이나 우편엽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노란색의 둥글고 행복한 표정의 얼굴 스티커를 기억하십니까?
그 스티커에는 대개 <스마일>이라는 한 마디의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모자를 쓰는 것같이 아주 쉽게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배우의 소질이 있는 사람은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에도 행복한 얼굴을 할 수가 있다.
좋은 환경에 있을 때에도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다.
좋은 건강과 수입과 좋은 집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미소는 마음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미소다.
이러한 미소는 비록 삶에 물질적인 축복이 거의 없을 때에도 여전히 기쁨을 준다.
그는 마음속에 있는 기쁨이 미소 짓게 해주기 때문에 미소를 일부러 지을 필요가 없었다.
막내 아이의 유치원 시절이 떠오른다.
사는 곳이 천여 세대 규모의 아파트였다.
아파트 내에 수령이 높은 나무가 많았던 터라 주변 사람들도 찾곤 했다.
주말에 막내의 손을 잡고 산책 나오면 주민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막내는 의례히 뛰어가 미소로 배꼽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은 어른들은 막내 이름을 다 알 정도로 열심히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는 아이였다.
그 당시는 인사 잘하는 아이가 내 자랑이며 나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된다.
아마 나도 어린 시절 그러지 않았을까 가능성을 가지려 억지로 유추해 본다.
미소가 없어진 것도 세상 탓으로만 돌리는 나를 발견하고 참 많은 때가 묻었구나 싶다.
사람의 인품을 단번에 세탁해주는 곳은 없을까?
별 생각이 다 든다.
어느 날 퇴근하며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을 무심히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거울 속에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 짐을 다 지고 있느냐 사뭇 진지한 것 같기도 하고 힘든 모습이 역력했다.
하루를 고스란히 바치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 곧 보여줄 얼굴이 저 무표정이란 말인가.
다른 이들에게 방금까지 <미소 지으세요. 웃는 얼굴이 좋아 보여요.>라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얘기하던
얼굴이 바로 저 지친 얼굴이란 말인가.
두 얼굴의 사나이가 따로 없다.
저 지친 얼굴로 어찌 가족들에게 안위를 주며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사회는 고압적이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둥.
나이 들면서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둥.
웃음이 헤프면 상대가 우습게 본다는 둥.
미소를 잘못 지으면 상대가 오해한다는 둥.
있지도 않은 얘기에 팔랑귀가 되어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며 거의 파김치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 자신조차 인정하기 싫은 표정이다.
현대인이 얼마나 웃지 않으면 웃음을 돈 주고 사고, 웃기 위해 학원도 다닌다.
웃지 못할 사실이다.
웃음치료사란 직업도 있고 무서운 암도 웃음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나 자신도 나이 든 어르신들이 무표정의 모습이면 곁에 가기 쉽지 않다.
몇 년 후 내가 그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샤워 후 멋 적은 모습으로 거울을 연신 닦으며 웃는 연습을 한다.
쉽지는 않지만 연기자처럼 매일 그렇게 노력해 본다.
웃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노력 탓일까 내 연기일까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자신이 웃는 쪽으로 발전했다.
화보다 미소가 낫지 않을까 싶어서다.
수많은 명언들 중 <펜은 칼보다 강하다>(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란 진리 안에 펜을 적절히 사용하여
주위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