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랑을 알려준 남자. 어느 날 그는 그림자처럼 곁에 있음을 알게 되고 흡인력 있는 눈길에 무거운 마음은 편안하게 자리 잡는다. 조용하고 가지런한 성품의 남자는 손길 하나에도 미숙함이 드러나고 숨소리까지 훔치며 방석처럼 내 옆을 지킨다. 비 오는 저녁 빗줄기를 피해 우산 속으로 마음과 마음이 찰랑거리며 부딪혔다. 가슴 콩닥거림이 그 사람이 들을까 호흡도 나누어 쉬게 되고 비바람 불면 불수록 이미 젖은 옷 이건만 비 피함을 핑계로 서로의 팔이 스친다. 짜릿함이 미소를 낳고, 잦은 스침을 내리는 비가 유도한다. 이내 오래된 일본식 솥밥 집을 찾아 따끈한 밥그릇을 마주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반찬삼아 도란도란 추억을 만든다. 금방 지은 솥밥이 찬밥 신세되고 얘깃거리로 서로를 탐색하느라 혼을 빼놓는다. 얘기는 반주 걸친 푸근한 아저씨들처럼 땅거미 드리워진 바깥공기와 어우러져 시간 가는줄 모른다. 가녀리기만 할 줄 알았던 남자는 화면 속 영화배우처럼 거침없이 내 손을 덥석 가져갔다. 그리곤 오랫동안 내 손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도 빌려간 손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부끄러움도 빗 속에 던져버렸다. 남녀는 그렇게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가나보다. 밖은 바람이 더 새 차 게 몰아치고 빗방울도 굵어졌다. 서로에게 묻지도 않고 택시에 올라타 갈래길 지점을 행선지로 정했다. 남자는 넓은 자릴 마다하고 불룩 솟은 가운데 자리를 고집하며 꼭 잡은 손이 땀이 차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사랑은 그렇게 너른 세상도 마다할 정도로 좁은 것을 좋아하나 보다. 길게 꼬리 늘어뜨린 차들 행렬 속으로 속으로 택시는 말없이 묻어간다. 차창의 빗방울이 강해질수록 가슴도 요동친다. 아, 햄릿의 고민이 이랬을까? 만남은 노량진 속성 학원처럼 세월을 용서하며 숙성되어갔다. 일주일에 두어 번의 만남은 매일로 변하고 매일의 만남이 갈증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아름다움으로 덧 씌워져 있었다. 남자도 팔색조가 있을까? 아마도 이 남자를 두고 남자 팔색조 단어가 지어질 것이다. 과거 얘기를 들을 때면 사라져 간 여인에 대한 질투심이 불기둥처럼 솟아오르고 아직도 혼자인 남자에 대해 거룩함과 성스러움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 남자는 나만의 팅커벨. 그리움을 벗겨주고, 꿈을 심어주고, 하루를 짧게 만들고, 환한 미소를 덤으로 선사하고 초라한 나를 공주로 만들어 준 유일한 남자다. 내 어찌 그 남자를 왕자로 만들지 못하랴, 그렇게 하루하루 우리들만의 성은 장미 넝쿨과 함께 올라갔다. 5월의 장미가 곁에서 손뼉 치며 화려함을 수놓아 갔다. 남자는 못난 나를 자신감으로 휩싸이게 하고 콧대를 높여놓고 빛나는 눈을 선사했다. 처박아 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주치의이자 코치, 세상 최고의 연주자였다. 흔치 않은 콘트라베이스 못난 얼굴은 어느새 화사함으로 화장하고, 찌그러진 마음도 잘 다림질되고 깽깽이 목소리는 편도선 수술을 했는지 편안한 중저음을 넘나들게 되었다. 남자의 연주 실력에 고른 옥타브를 넘나드는 인기 악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스치는 거리의 사람들도 내 모습에 눈길이 두세 번씩 부러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난 팅커벨에게 성형되어 새롭게 탄생되어갔다. 작은 실개천은 그 집 앞에 졸졸 흐르더니 이젠 송사리 노니는 맑고 깊은 도랑으로 변하여 갔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물소리에 넉넉하게 파묻힌다. 하늘을 보니 여지없이 파랗다. 꿈속에서 잃어버린 금가락지를 찾았나 보다. <김서방, 식사하게.> 친정엄마의 경쾌한 음성이 집안에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