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봄철 훈련 마지막 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야구선수 스티브 켐프는 투수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아 병원에 실려 갔다. 그러나 정규 시즌 개막전에 그는 자신 있게 타석에 나섰다. 그는 노련한 투수의 빠른 공을 안타로 쳤다. 다음 타석에서는 홈런을 쳤다.
경기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에 맞은 다음 나는 나 자신에게 ‘그 일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일로 두려워하면 자신과 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요>
수년 전 아주 쓰라린 경험 앞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나도 적이 던진 <투구> 에 심하게 맞았다. 사고로 하루아침에 중환자 신세가 되어 3개월이 지나서야 병문안을 맞이하게 되었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의 투혼은 사고 시부터 일여 년에 걸쳐 시작되었다. 병문안 오는 그룹(?)들은 병실 문 밖에서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들어왔다고 한다. 어차피 고통이 수반된 치료시간 동안 간병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난 위로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내 통증은 순간이지만, 나에겐 지금껏 <적>이다. 난 적에게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싸워보자> 생각이 마음으로 마음이 얼굴 표정으로 그리고 하루를 지배하다 보니 방문객과 이웃들과 간병인과 가족들조차 나의 통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밤마다 통증이 심해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이 익숙해 질만도 하지만 온 신경들의 외침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늦은 밤, 환자들의 고른 호흡과 뒤척이는 소리 외엔 고요한 병실, 알 수 없는 숫자를 방송이 나왔다. 그 방송은 어느 병실에 환자 사망을 알리는 암호였다. 또 어느 날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간병인을 통해 알아보니 암환자가 통증을 못 참고 투신하였다는 것이다. 드레싱을 위해 침대 이동할 때도 검사받으러 이동할 때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환자를 보면 동족애를 진하게 느낀다. 우린 눈빛으로 서로의 고통을 순간적으로 얘기하곤 한참을 우울해한다. 그 어두운 그림자는 증폭되어 나를 깊숙하게 숨기게 된다.
매일 간호사의 손에 들려오던 알약 중 수면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루 세 알씩 모으기에 이르렀고 통증과의 전쟁에 허약한 심정은 하얀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그즈음 친정엄마의 기도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내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과연 통증과 타협이 가능한가, 38선을 긋듯 휴전이 가능할까? 그다음부터 통증에게 명령에 이르게 되었다. 고통의 밤은 수없이 지났지만 나와의 이별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토록 질긴 통증이란 녀석을 생각과 마음과 얼굴의 미소로 화답하다 보니 절로 아듀 하게 되었다.
이런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다. 의료진도 가족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도 실패의 충격을 당해 보았습니까? 가족과 이웃은 당신을 회복시켜 다시 일꾼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