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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우리나라 문단에서 가장 '무인' 같은 문인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인 <칼의 노래>의 잔향과 비장한 문체가 전장(戰場)의 느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훈 글이라 하면 긴 호흡의 장편소설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장중함 속 정제된 문장은 에세이나 단편에 적합한 요소도 많다.
<강산무진>은 작가의 문장력이 짧은 이야기들과 어떻게 조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모음집이다.
단편들은 건조한 직시와 냉철한 통찰이 잘 어우러져 장편소설 못지않은 긴 여운을 남긴다.
책에는 이상 문학상 수상작 <화장>과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 <언니의 폐경> 등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주제의식과 맥락은 다르지만 8개의 단편은 중년(중년만큼 인생의 짐이 무거운 청년 포함)
남성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언니의 폐경>만이 유일하게 여성의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폐경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단편들은 중년 남성의 느낌 그대로 세상의 풍파와 세속의 법칙에 닮고 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육체의 나약함과 관계의 피상성에 대한 무기력하고 무덤덤한 시선이다.
책은 그네들, 혹은 그네들 주변인(부인이나 어머니)의 와병과 이혼에 의한 삶의
피폐함을 여과 없이 묘사하고 있는데, 감정의 동요 없이 사실적 묘사가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쓸쓸하고 부질없는 삶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육체의 나약함이나 관계의 피상성보다 더 처량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밥벌이의 비루함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강박관념은 주인공들의 업무처리가 능수능란해질수록 그 처연함을 깊게 만든다.
남자로서의 경제적 책무감은 일상을 조여오지만,
막상 그런 일상을 잃었을 때의 막막함 때문에 쳇바퀴 같은 인생은 반복된다.
소설은 택시기사와 대기업 임원, 항해사와 교수,
그리고 권투선수와 강력반 형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의 구체적인 직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보편성을 넓게 펼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