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년 영국을 출발해 신대륙에 도착한 144명은 존 스미스 대장을 중심으로
버지니아의 체사피크 만에 제임스타운이라는 첫 정착촌을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이주 준비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미국의 지질과 기후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설립 직후부터 극심한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갈등했고 외부적으로는 인디언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말라리아가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양식이 떨어져 아사 위기까지 겹쳤습니다.
결국 정착 1년 만에 겨우 3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결국 정착 1년 만에 겨우 3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1609년 제임스타운을 유지하고자 영국에서 500여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보내줬지만
결국 남은 주민들은 60명에 불과했습니다.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퍼시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우리처럼 불쌍한 영국인들은 없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신음하고, 도처에 불평과 고함만 가득하다.
게다가 일부는 도망갔다.”
결국 이들은 제임스타운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그해 6월 10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 바다로 도망나왔습니다.
1620년 9월 6일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1620년 9월 6일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해 11월 10일 매사추세츠 케이프카드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역시 미국 북동부의 혹독한 추위와 폭설, 그리고 질병과 기아로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고난을 당했으나 고난을 대하는 자세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1월과 2월 동안 100명 중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 이제 5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1월과 2월 동안 100명 중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 이제 5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 가운데 건강한 이들은 6∼7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땔감을 가져오고 음식을 마련하며 병든 자들의 더러운 의복을 세탁해 준다.
사람들은 기쁨으로, 자원하는 맘으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수고스러운 일들을 감당했다.”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공동체와 매사추세츠의 청교도타운 공동체의 반응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공동체와 매사추세츠의 청교도타운 공동체의 반응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제임스타운은 상업적 목적으로 설립됐고, 청교도타운은 신앙적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임스타운도 신앙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들 역시 도착한 첫날 예배로 정착촌의 삶을 시작했고, 작은 창고에 교회를 세워 주일마다 모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황금’이었습니다.
반면 청교도들의 목적은 ‘신앙’이었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핍박을 받던 청교도들은 모두가 신대륙 이주를 두려워하던
그때에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가기를 결심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낄까요.
왜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낄까요.
고통스런 현실 때문이 아니라 오늘을 잘 살아내야 할
가치 있는 날로 여기는 사명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믿음은 오늘을 잘 살아내야 할 소중한 날로 여기게 합니다.
현실이 어떠하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신앙의 자유가 아닐까요.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자유하기를 바랍니다.